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3세 (문단 편집) === 재위 기간 ===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에게 잔혹하게 폭탄으로 암살당하자, 그는 테러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피의 성당|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폈었던 정책들과는 전혀 반대로 나라를 돌린다. 상당히 전제주의적인 정치를 폈는데, 자신의 아버지의 즉위 기간에 생겼었던 개혁들 중에 사실상 [[농노]]해방을 제외하고 모두 철회했고 더욱 더 강한 [[차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급진파에게서 잃고 나서 안 그래도 싫어하던 급진파를 증오까지 하게 되어 여러 급진파들을 잡아 대대적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알렉산드르에 의해 목이 달아난 사람들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라는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블라디미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이 동생이 바로 훗날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다. [[러시아/역사|러시아의 역사]]상 명재상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비테]]가 러시아의 공업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한 때가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다. 알렉산드르 3세는 비테를 매우 신임하였고 비테 또한 알렉산드르 3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참고로 비테가 알렉산드르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상술한 기차 탈선 사고. 황제에게 분명히 기차에 문제가 생길 테니 점검을 해야 한다고 직언했으나 그걸 무시했다가 결국 기차가 탈선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황제는 비테의 능력을 신임하게 되었다. 비테의 주도 아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이룬 이 시기[* [[러시아]]의 인구가 많아 1인당 산업화지수는 여전히 [[유럽]]에서 바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이때 러시아는 이미 철강 생산량을 포함하여 세계 4~5위를 넘나드는 산업규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용사|참전 경험이 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러시아 육, 해군의 전력증강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 러시아 육군은 양적으로 예비군 동원 체제를 정비하여 3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렀고 질적으로도 소화기 면에선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 예비 여단까지 보급되고 야포 국산화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군 또한 대규모 건함 계획이 실시되어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의 육군과 세계 3위의 해군을 보유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영토가 워낙 넓다 보니 이러한 군사력이 단번에 투사되기는 어려웠다. 대규모의 군비증강과 전제주의적인 국내정치와는 반대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철저한 평화주의였기에 전쟁을 피했으며,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를 개인적으로는 매우 싫어하면서도 [[삼제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에서 군국주의자인 [[빌헬름 2세]]가 집권한 이후에는 독일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이 [[삼국 협상]]의 밑바탕이 된다. 그의 재위 중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명이 '[[피스메이커]](миротво́рец / mirotvórets, peacemaker)'였다. 반면 알렉산드르 3세 사후에 즉위한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전제주의는 그대로 답습했지만 평화에 대한 헌신은 등한시하여, 재위 중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제위와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여담으로 알렉산드르 3세는 방계 황족들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황제의 적자 후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던 대공위[* 일괄적으로 Grand Duke of Russia로 번역되곤 하지만 [[러시아어]]로 공작을 의미하는 크냐지가 영어로 Prince로 번역되는 것을 감안하면 Grand Prince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이는 그들도 인지하고 있으나 이미 18세기, 19세기부터 Grand Duke라고 표기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Grand Duke로 표기하고 있다.]를 황제의 친손주까지로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 역시 위의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제주의적 통치의 일환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